카운터 일기
카운터 일기 | 이미연 | 시간의 흐름 | 2019
"넌 이제 커피의 신이야. 커피를 달라고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커피를 마시기 전이니까 제정신이 아닌 좀비들이거든? 그들에게 커피를 줄 수 있는 너는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들이 아무리 재촉해도, 무례하게 굴어도 쫄지 말고 네 페이스대로 천천히 해줘. 어쩌겠어? 커피를 가진 자는 너인데."
익숙한 것들이 차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에 들어와 차차 낡아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도 이 거리에서 매일 조금씩 낡아가는 중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무언의 규칙, 즉 상식을 열심히 쌓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그간 쌓아온 상식을 가차 없이 부수며 사는 것이 어른의 삶인가 보다. 덧붙이자면, 상식을 깨기에 가장 좋은 기회는 먼 곳으로의 여행과 연애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상식 폭격, 상식 학살의 최고봉은 결혼이다. 나와 내 가족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온 그 많은 것들이 '우리 집 특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의미 없는 말이라도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과 활자화시켜서 꺼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쁘고 너무 피곤해서 미루기만 했는데, 이것은 내 육체와 정신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정신이 건강치 못하면 육체도 함께 병들고 육체가 지치면 정신도 함께 지치니까.
함께 일하는 바리스타 중에 생물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사람의 정신이 내장 상태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얘기해주면서 "너라는 존재는 전적으로 소화기관에 달린 거야 You are actually all about your gut"라고 말했는데 깊이 동감했다. 장기가 조금만 불편해도 예민해지고 일상이 힘들다 못해 우울해지기까지 하니까.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물은 적은 많지 않았더 것 같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괜찮냐고, 이의 없냐고 하는 질문 아닌 질문을 받은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대부분 내 의사와 상관없이, 아니 내 의사가 무엇인지 들여다보기도 전에 "응? 으...... 으응." 하며 얼결에 동의하며 정해진 답을 따르게 된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상당한 갈등 상황을 각오해야 한다. 내가 직접 선택한 길이 잘 풀리지 않는 경우 원망할 사람이 나 자신이고 그것을 해결할 사람도 나 자신이다. 하지만 남의 선택에 맞춘 길이 만족스럽게 풀리지 않을 경우에 그 결과는 고스란히 내 몫이다. 원인과 결과의 주체가 이어지지 않으니 해결은 배로 어려워지는 것이다.
커피와 커피를 파는 공간의 무용함은 얼마나 소중한가. 카페에 찾아와서 책을 잃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람을 구경하고 그리운 이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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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갈 수 없던 시절에 읽은 글. 오전의 조용하고 한산한 카페도 좋지만, 복작거리는 카페에서 웃고 떠드는 시간은 또 얼마나 소중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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