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 | 김영사 | 2019
트라우마가 빛을 발할 때는 오직 우리가 트라우마로부터 치유되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순간들이다. p.69
에고와 그림자의 관계는, 마치 빛과 그림자의 관계와 닮아서, 에고가 뛰어난 연기를 펼칠 때마다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어두워진다. 쾌활한 척 행동할 때마다 '아,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는 후회의 그림자가 쌓인다. 트라우마를 잊은 척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수록 내면에 드리워진 짙은 슬픔의 그림자는 더욱 두텁게 무의식의 퇴적층에 쌓이게 된다. p.70~71
내면의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는 자아에 초점을 맞출 때 무의식은 균형을 잃게 된다. 셀프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개성화와 에고의 인정 투쟁을 추구하는 사회화가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그 균형을 잃으면 에고 인플레이션으로 치닫게 된다. 에고가 눈에 보이는 행복happiness을 추구한다면, 셀프는 그런 것들로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의 전체성wholeness을 추구한다. 눈에 보이는 행복을 얻지 못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치와 엶아을 따르는 것, 온 마음을 다해 사는 것, 그것이 셀프의 지향성이다. p.75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일상 속의 길은 뭘까. 나는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내면의 희열, 즉 블리스Bliss를 가꾸는 일상 속의 작은 실천이라고 믿는다.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모든 기쁨이다. 시간뿐 아니라 슬픔과 번민, 세상조차 잊게 만드는 내적 희열이 바로 블리스다. 꽃을 가꿀 때 모든 슬픔을 잊는다면 그것이 블리스고, 음악을 들을 때 모든 번민을 잊는다면 그것이 블리스다. p.92
우리는 우리 안의 하이드, 우리 안의 그림자와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개인의 내면에 도사린 그림자가 폭력이나 범죄로 폭발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대안을 그림자를 보살피는 삶에서 찾는다. 그림자를 보살피는 법, 즉 자기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되돌아보며 도사린 상처와 그늘을 찾아내는 방법은 매우 느린 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폭력성과 숨은 그림자와 대면하는 법을 훈련하면 분노가 우리 자신을 집어삼켜 초래하는 비극을 분명히 예방할 수 있다. p.97
페르소나는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기하고 다듬어온 인격이다. 그러니 페르소나란 매우 연기력이 뛰어난 나, 우리의 진짜 감정을 숨기기 위한 정교한 가면이기도 하다.
페르소나의 놀라운 점은 가끔 페르소나가 너무 진짜 같아서 그 역할을 연기하는 자기 자신도 그 페르소나에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페르소나를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트라우마에 직면했을 때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저 사람은 참 성격이 좋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성격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너무 과도하게 애를 써왔다는 사실을 자신조차 모를 때가 있다. p.90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기 마련이지Every man has breaking point." 나는 내 한계를 너무 높이려고만 한 것은 아닌지, 고통의 한계는 물론 행복의 한계도 무한정으로 설정해 놓고 스스로를 괴롭혀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p.105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안의 고통은 경감될 수 있다. 스트레스는 일시적이고 통제 가능하다. 트라우마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는 순간에 덮쳐올 수 있기에, 통제 불가능하고 평생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시험이 끝나면 해방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스트레스다. 하지만 '언제나 시험운이 없다' '무슨 시험을 봐도 합격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트라우마에 가깝다. p.173
자신의 가치를 주변의 인정으로 확인받는 경향이 강할수록, 번아웃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성실함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맹목적인 성실함과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여백 없는 삶이 번아웃을 부추긴다. p.183
거절을 시작하지 않으면, 내 안의 진짜 요구를 들어줄 수 없게 된다. 내 안의 진정한 질문은 '당신은 왜 이 일에 집착하는가' '당신은 이 일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가' 같은 좀 더 본질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일 속에 빠진 상태에서는 그런 근원적인 통찰에 이를 수 없다. p.187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명적인 고통 중 하나는 '재난 이전'과 '재난 이후'가 결코 같지 않음을 깨닫는 것, 즉 '재난 이전의 나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참혹한 자기인식이다. p.216
엘렌 랭어는 <마음챙김>에서 노인을 위한 긍정적인 마인드 세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노인이 된다는 것을 곧 병약함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노인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데, 바로 그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상태가 노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니,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고, 자존감은 더욱 떨어지게 된다. p.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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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끝자락에 읽었던 책. 정리하면서 보니 좋은 부분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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