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 정지민 | 낮은산 | 2019
여성은 약자지만 나의 정체성은 그보다 다양하다. 일상의 많은 상황에서 나는 약자일 때도 있지만, 강자일 때도 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강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나의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13~14
사람들은 타인을 예전만큼 잘 참을 수 없게 됐다. 함께는 가끔 좋지만 혼자가 대체로 편하기에 후자를 위해 전자를 포기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시대에 결혼이 갖는 가치가 있다면 시대착오적이고 맹랑하게도 영원을 약속하는 점 때문이라 믿는다. p.16
평등을 지향하는 현대의 부부들에게는 정해진 역할이랄 게 없고 모든 것이 협상의 대상이다. 많은 젊은 부부들에게 가사의 피로란 노동의 피로이기 전에 이 끝없는 협상이 야기하는 피로라 할 수 있다. 정답은 없고, 협상은 지난하다. p.50
부부가 함께 '페미니즘적 가정'을 만드는 건 장님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본 적 없는 코끼리를 그리려는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둘의 입장은 상반된다. 노동의 배분 같은 문제에서는 첨예하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니까, 라고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서로 사랑하는 인간이란, '그래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니까 양보하자'고 통 크게 마음먹었다가도, '아니 근데 저 인간도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나만?'이라는 지당한 의문에 사로잡히고 마는 갈대 같은 존재다. 참조할 모델도 부족하고, 있다고 해도 가정마다 상황이 천차만별이다. 어쨌든 둘이서 지지고 볶아 각자의 균형에 도달해야 한다. p.54~55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많은 부부는 아이가 없다. 그들도 함께하는 삶을 위해 여러 가지를 양보하거나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각자의 삶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출산과 함께 이 균형이 와르르 무너진다. 나름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부부도 출산과 육아에 이르면 십중팔구 갈등을 겪는다. 남성들은 아빠가 되는 것과 자신의 커리어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둘은 보통 일치한다. 커리어를 쌓아 갈수록 아빠로서도 훌륭해진다. 여성만이 둘 사이에서 번민하며 자책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내 일을 하는 것도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은데, 어떤 선택을 해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출산을 고민하는 여성들을 지배한다. P.109
경멸이란 무엇인가. 내가 당신을 안다는 것이다. 당신의 허영, 좌절, 욕망과 시도 모두 나의 손바닥 안이기에 당신은 내게 지루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랑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자신이 완전히 그러잡을 수 없는 존재를 욕망한다.
(중략) 상대에 대해 잘 모를 때, 우리는 상대의 반응과 몸짓과 눈빛을 이리저리 해석해 보며 초조해한다. 나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경멸에는 애정은커녕 최소한의 조심스러움도 없다. 경멸은 당신이 내게 어떤 균열도 낼 수 없는 지루한 존재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사랑했던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장소다. p.156~157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인데, 그냥 다른 게 아니라 사랑을 느끼는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내가 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그는 주지 않고, 그에게 나 또한 그렇다.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사랑하는데 정작 상대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서운해하며 엔트로피 0과 100 사이를 각자의 속도로 왕복운동하는 것이 함께 살기다. p.175
비혼의 이유만큼이나 결혼의 욕구도 다양하다. 국가의 지원 때문에 결혼한다는 실리파도 있고,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제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파, 결혼은 복지가 엉망인 이 나라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후 대책이라는 보험파도 있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행위 자체에 매료된 나 같은 낭만파도 있다. 확실한 건 어떤 여성도 가부장제 존속에 기여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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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과연 잘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초조함으로 읽어 본 책.
우리는 비출산을 약속했고, 집안일은 가급적 외주를 주기로 했다. 그래도 같이 살려면 부딪히는 게 많을 것이다. 남친 또한 결혼을 앞두고 걱정되는 게 많다고 했다. 나만 걱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때로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결혼하고 1년쯤 된 시점에 재독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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