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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일치를 꿈꾸며 살아요

이제야 언니에게

  • 2020.02.16 18:29
  • 冊 - 밑줄

이제야 언니에게 | 최진영 | 창비 | 2019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그런다. p.32

 

제야는 제니가 부러웠다. 글을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 어른들은 제야를 보고 맏이라서 의젓하다고 했다. 제니에게는 막내라서 철이 없다고 했다. 제야는 그런 식의 구분이 싫었다. 그런 말로 자기를 '싫어요'라는 단어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만 같았다. p.38

 

우리 학교에서 판사가 나왔다는 얘기는 아저씨한테 처음 들었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좀 별로다. 그 판사가 우리 고등학교 나와서 판사가 됐겠나.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서 된 거지. 그런 어른들은 꼭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연결을 시킨다. p.68

 

우리에겐 각자의 그늘이 있지. 나는 그 그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때로는 그늘이 그 사람을 고유하게 만드는 것도 같다. p.72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고 당숙은 말했지만 제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당숙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던 그 순간 눈앞에 제야가 있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했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일을 벌인 후에도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들에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p.108~109

 

제야는 혼자 울었다. 남들 앞에서는 울지 않고,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잘못은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했어요. p.117

 

누군가는 내게 당당하라고 하겠지. 주눅 들지 말고 떳떳하게 살라고 말하겠지. 그런 말도 역겹다. 누구도 내게 떳떳해져라 당당해져라 말할 수는 없다. p.132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p.133

 

이모는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p.160~161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젊고 돈 많은 솔로 이모를 생각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p.173

 

다 큰 남자가 겁도 없이, 다 큰 남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 큰 남자가 울면서 하는 말이라고 다 믿어선 안 돼, 그런 말을 할까? 다 큰 남자가 술을 마신 것 자체가 문제라고, 다 큰 남자가 착각한 거 아니냐고, 다 큰 남자가 이미 소문이 나버렸으니 인생 글러먹었다고, 다 큰 남자가 총각도 아닌데 먼저 자빠졌는지 자빠트렸는지 알 게 뭐냐고 말할까? 가해자 보듯 그를 볼까? p.201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도 있는 짓'만 안다. 돈이 맣으면 돈도 많은데 무슨 대수냐, 궁핍하면 불쌍하니까 눈감아주자, 돈이 적당히 있으면 먹고살 만해서 잠깐 딴 생각을... 그러므로 이곳에서 남자는 언제나 그럴 수 있다. p.206

 

그러니까 제니야,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p.224

 

나는 어린 여자애여서 무시당했다가 젊은 여자여서 의심받고 늙은 여자여서 무시당하게 될 거야. 하지만 어릴 때, 너와 승호와 함께일 때 나는 달랐어. 강릉 이모와 함께일 때도 나는 달랐지. 나는 그냥 나였어. 나를 주장하거나 증명할 필요도, 나를 부정할 필요도 없었어.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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