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식탁
정치적인 식탁 | 이라영 | 동녘 | 2019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다. 밥상 뒤엎는 사람, 밥숟가락을 먼저 들 수 있는 사람, 식사 중에도 계속 움직이며 시중드는 사람, 직사각형 식탁의 가장 '윗자리'에 앉는 사람, 준비된 음식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사람, 제사상의 도리를 입으로만 따지는 사람, 성별에 따라 먹는 입과 노동하는 손의 역할을 구별하기 등 식탁에는 권력이 오간다. p.8~9
남자는 밖에 나와서 '여자 끼고' 술을 마셔도 근무의 연장이지만, 여자는 밖에서 밥만 먹어도 노는 여자다. 아침 해장국은 노동자 서민의 밥상이고, 브런치는 사치한 된장녀의 밥상이다. 노동자의 남성적 이미지와 소비의 여성적 이미지라는 편파적인 구도가 이런 관념을 만든다. p.19
여성의 섭식장애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불임'에 대한 걱정도 크다. 이 또한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몸에 가두어놓고 걱정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여준다. 무월경, 불임, '성격 나빠진다', '심하면 죽는다' 등 섭식장애의 결과를 강조할 뿐, 왜 유독 젊은 여성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그 밑바닥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섭식장애는 청소년과 20대 여성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초등학생, 그리고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40대 여성도 늘어나는 추세다. 삶이 길어졌다는 것은 여성에게 다이어트의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는 뜻이다. p.33~34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무너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문제'는 진정한 사회문제가 아니듯이. p.43
번역에는 번역자의 차별적 시각이 담긴다. p.69
어린아이의 양육은 '자라나는 미래'라는 생각에 그나마 사회적 관심을 받는 편이다. 출산에 대한 독려는 아이를 미래의 '공공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늙어 사회적 생산 활동의 영역에서 멀어진 이들에 대한 돌봄은 더욱 소외당한다. 소멸될 대상을 돌보는 일이기에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다. 성장하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식의 미래를 통한 보상을 기대한다면, 죽음을 향해가는 노인을 돌볼 때는 이러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일부 자산가만이 상속이라는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자녀에게 질 좋은 돌봄을 기대할 뿐이다. p.79~80
여성에게 남성이 끊임없이 밥을 강조하는 태도는 정확히 권력의 표현이다. 여성에게서 가장 필요로 하는 두 가지가 밥과 섹스이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대로 "어떻게 아내를 하녀인 동시에 반려자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남자들이 해결하려고 애쓰는 문제들 중의 하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환상이 바로 '사랑'이다. p.112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 권력자다. 한가하다는 뜻이 아니다. 남의 시간을 제 시간으로 끌어올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윤 창출을 위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을 수 있는 힘, 이것이 권력이다. p.134
아마다 날마다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사람들로 세계는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이 있고, 엎어져 울고 싶은 벌판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홀로 흐느끼는 이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밥, 살, 말. p.210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에게 신세지는 것에 대해 너무 결벽증적으로 어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리를 두면서도 때로 우리는 침투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맺고 산다. 내가 신세를 질 수도 있고, 남에게 신세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p.233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드나드는 공간이어야 관계의 순환이 원활하다. 어느 한 사람이 부엌이라는 공간에 과하게 머물고 있다면, 식탁에 편히 앉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집안의 관계는 어디에선가 막히기 마련이다.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