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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2019.12.25 01:38
  • 冊 - 밑줄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허새로미 | 현암사 | 2019

 

누군가 "너는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한다"라고 할 때 그건 사실 칭찬이다. 해당 언어의 본질을 내가 잘 파악하고 있다는, 자신이 한국어의 위계적 특성을 활용해 관계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내가 가로막고 있어 불편하다는 신호이므로. p.44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도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 달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선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위협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p.50

 

언어는 실제로 있었던 일과 나 사이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한다. 내가 자주 접하는 언어가 폭행 대신 손찌검을 자꾸 쥐어준다면 내가 아무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문장에서 손찌검이 들어오는 자리는 내게 천막으로 가려놓은 웅덩이 같다. 누가 왜 가려놨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래 정확히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릇이다. 걸음을 멈추고 의심해보아야 한다. p.56~57

 

말을 예쁘게 하라는 소리를 듣는 건 그런 일이다. 정확히 뭘 바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 승인을 유예당하는 일. 전달하고픈 핵심보다는 그 외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각을 내면화하는 일.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누구에게도 말 예쁘게 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려 다짐한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데 그런 요구가 난무하는 것은 텅 빈 신호를 보내는 일이고, 텅 비었는데 화자의 기분만을 전달하는 언어 신호는 관계를 망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혼란스럽게 한다. 요구한 사람은 자기가 뭘 바랐는지 모르게 되고, 강요당한 사람은 예쁘든 못생겼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묵을 지키고 만다. p.61

 

타인을 드세다고 부르는 것은 자기 고백에 가깝다. "여자가 저렇게 드세면 남자들이 안 좋아해", "어린 놈이 당돌하네", "쪼끄만 게 맹랑한 소리를 하네" 등은 상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씁쓸함과 약간의 비통함 그리고 악의를 담아, 좀 복수하듯이 이르는 소리다. 남을 드세다, 당돌하다, 맹랑하다고 부를 정도의 권력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혹은 그런 권력을 선언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목소리다. 누군가가 나를 "싸가지가 없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가 나의 위꼐를 그의 것보다 낮게 보았다는 실토나 다름없다. p.89

 

'억울'이 등장하는 여러 상황을 보면 오늘날 억울함은 그저 부당함unfairness에 대항해 생기는 감정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억울함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남용되고 별로인 기분을 가장 잘 알리는 한마디이며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나는 울면서 억울해할 수도 있고 웃으면서 억울해할 수도 있다. 억울이 커버하는 감정의 영역은 너무도 커져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언어가 되고 말았다. p.112

 

한국어의 특정 어휘나 일부 어미는 철저히 위계를 따른다. 교수님이나 대통령에게 "독바로 서세요"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정자세를 취해주시겠습니까?"가 고작일 것이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언어에 호흡 곤란과 과부하가 온다. 말 걸기가 힘든 사람일수록 성공한 사람이 된다. p.141~142

 

한국어는 대단히 흥미로우며 섬세한 언어이다. 위계와 분위기를 매우 잘 읽어내며 주변을 배려한다. 다만 매우 여러 겹의 모욕을 다른 언어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p.143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다.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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