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말이 칼이 될 때 | 홍성수 | 어크로스 | 2018
혐오표현이라는 과격한 용어의 사용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반차별운동'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된장녀가 왜 혐오표현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왜 된장녀'도' 혐오표현일 수 있는지 설득하는 과정 자체가 운동이라는 것이다. p.34
남성이나 기독교와 같은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 소수자들처럼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p.43
어떤 특정 집단을 지정해 배제하는 것은 항상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는 영업을 위해 필요하다는 정도를 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업이 도저히 불가능하고 도저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피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p.52
실제로 "조선족을 몰아내자"고 하는 것보다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그래서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도 혐오표현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p.63
연구자들은 혐오표현의 해악을 대략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혐오표현에 노출된 소수자 개인 또는 집단이 '정신적 고통'을 당한다. 둘째, 혐오표현은 누구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 셋째,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 차별이며, 실제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p.75~76
편견을 밖으로 드러내면 그것이 바로 혐오표현이다. 편견은 고용, 서비스, 교육 등의 영역에서 실제 차별로 이어지기도 하고, 편견에 기초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자는 '차별행위'이고, 후자는 '증오범죄(hate crime)'라고 불린다. p.82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것을 내뱉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옆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어라, 저렇게 말해도 괜찮네." 한 사람, 두 사람 거침없이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더욱 강도 높게 말하는 것이 인기를 끌게 되어 혐오표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p.83
혐오표현을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표현'을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재앙을 불러오기 전에 표현 단계에서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혐오표현 금지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p.122
퀴어문화축제 자체를 막으려는 것은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라고 강요하는 적극적인 행위다. 퀴어문화축제가 성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visibility)'하는 것이라면, 이들은 '비가시화(invisibility)'를 요구하는 것이다. p.129~130
드러내지 말고 살라는 요구 자체가 차별이다. 게다가 어떤 소수자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동성애자임을 드러내지 않으면 동성혼이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 즉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등의 비가시화 요구는 그 자체로 차별이며 비가시화가 관용이나 평등과 양립할 수는 없다. p.130
혐오표현이 골치 아픈 논쟁을 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표현'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기에, 험오표현이 표현에 머무는 한 함부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혐오표현 문제는 늘 표현의 자유와의 대립 속에서 논의되곤 한다. p.145
혐오를 혐오로 맞받아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여성혐오도 나쁘고 남성혐오도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도 등장했다. 악에 대해 악으로 되갚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제법 그럴듯한 논리지만, 이것은 미러링의 취지를 오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러링은 뒤집어서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혐오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