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 하정우 | 문학동네 | 2018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p.32
내 갈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p.41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p.78
유머는 삶에서 그냥 공기처럼 저절로 흘러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면 이런 유머가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일상에서 유머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p.127
죽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에겐 아직 최소한의 걸을 만한 힘 정도는 남아 있다. 그리고 걷기에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태엽을 감아주는 효과가 있어,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더 버티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p.168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 p.186~187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p.206
나는 '남자답다'라는 알쏭달쏭한 말보다는 '사람답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조금 더 기쁜다. p.234
캐스팅된 후 <아가씨>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내가 맡은 백작의 대사는 거의 70퍼센트가 일본어였다. 일본어 분량이 많은 역할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나리오에 한국어 독음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의 주문은 일본어 대사를 소화할 때 금붕어처럼 한국어로 음만 따라할 게 아니라,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미리 공부해서 하나하나가 어떻게 발음되고 연결되는지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배우에게 요구하는 사항마저 차원이 다른 영화인이 박찬욱 감독이다. p.280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들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강도와 밀도로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새로운 날들이 기다려진다.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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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팟캐스트에서도 추천하고 동기 언니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해 주어 뒤늦게 읽게 됐다. 예상대로 술술 읽히고 나가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물론 요즘 같은 날씨에 읽었다면 그런 생각도 안 들었겠지만ㅎㅎ
라면에 고수를 넣어 먹는다든가 쌀뜨물로 미역국을 끓인다든가, 물을 조금씩 추가해 가며 북엇국을 끓인다든가 하는 소소한 팁도 좋았다. 다른 건 몰라도 라면에 고수는 꼭 시도해 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