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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일치를 꿈꾸며 살아요

다가오는 말들

  • 2019.06.09 12:20
  • 冊 - 밑줄

다가오는 말들 | 은유 | 어크로스 | 2019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내 책상 위에는 미학자 양효실의 말이 붙어 있다. "단언컨대 아이들은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할 뿐이고, 어른들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일 뿐이다." p.7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서로 아무런 삶의 연결고리가 없을 때 더 쉽게 혐오하지만,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 p.9


얼마나 멋진 문제 설정인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정리한다는 건.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p.76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중략)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p.100


딸 키우는 아빠로서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는 글을 봤다. 어딘가 궁색하고 근원이 수상쩍다. '아무 남자에게 내 딸 못 준다'는 말이나, TV 자막으로 박히는 '딸바보'라는 단어가 거북살스러운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 정서와 내 핏줄의 안위가 중한 가족주의에 기반한 발언이다. p.127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p.128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한다고 죽이고 꽃 꺾듯 존엄을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p.134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p.163


첫째, 소위 '원조교제'나 '조건만남'으로 불리는 10대 성매매는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착각을 주지만 한쪽이 취약한 처지이므로 성착취라는 말이 합당하다. 둘째, 전 세계는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에 대해 엄격하게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는 추세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범죄라는 인식조차 미약해서 가해자들이 외려 당당하게 군다. 셋째, 성착취라는 말이 일반화되면 "당당한 놈들도 바퀴벌레처럼 숨을 것"이며 성착취도 사라질 것이다. p.165~166


위계와 위치에 따라 각자 느끼는 감각은 다르다. 내가 안락하면 남은 그만큼 힘겨운데, 안락한 자는 그 사실을 몰라서 더 안락하다. p.186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차별 감정의 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애정의 표명 중에서 가족애의 표명만이 안전한 특권을 가진다. 어떠한 빈축도 사지 않고 어떠한 비판도 받지 않는다. 이는 가족 복이 없는 사람, 가족이 없는 사람, 아니 한발 더 나아가 가족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가족을 미워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인연을 끊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잔혹한 현실이다."(140쪽) p.194


나는 여성이지만 이성애자로서 남자들이 남성성을 향유하듯 이성애자의 언어를 무심히 구사해왔다. 30대 남성에게 '여자친구 있어요?'라며 대상 성별을 지정해 물었다. 그건 상대가 성소수자일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제는 그런 질문이 꼭 필요할 때 '애인 있느냐'고 묻는다. p.262


"아줌마도 이런 데를 다녀요?" 질문도 질타도 감탄도 혼잣말도 아닌 그것은 '아무말'. 아이와 다니면 존재가 납작해진다. 몰개성, 무취미, 무례함의 대명사 '아줌마'는 제3의 성으로서 청소년, 흑인, 여자처럼 머무를 장소를 선택하는 데에도 제약이 따른다. 트집 잡는 이들을 무시로 대면해야 한다. p.277


인간은 경험적 존재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했고 가난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아닌 학습 능력만 평가하는 제도를 통과해 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이루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우리 사회의 경제 체제가 공정하게 변화하기 위해선 계급 분리를 조장하는 입시 제도부터 달라져야 할 텐데, 현실은 요원하고 수능은 요란하다. p.296


'관대함은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는 말은 진리다. 좋은 부모 노릇은 10계명이 아니라 등 따습고 부른 배, 심리적 평안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그냥 부모는 없다. 건물주 부모, 그 건물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부모, 만사가 귀찮은 갱년기 부모,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해 화가 난 젊은 부모가 있을 뿐. p.298


-

'시사인' 연재 때부터 재미있게 읽었던 은유 작가의 글.

단행본으로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왔다. 오래 기다린 터라 출간한 지 한참됐는데 아직도 안 읽었다고 생각했건만, 이제 겨우 석 달 된 책이었구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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