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아무튼, 술 | 김혼비 | 제철소 | 2019
똘똘똘똘 소리 하나 듣겠다고 소주 한 잔 마실 때마다 그렇게까지 번거로운 일인가 싶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유의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집요해지는 나를 볼 때가 나, 잘 살고 있구나, 라는 가느다란 뿌듯함이 드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p.36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본다. 기분 좋은 취기만큼 훌륭한 술맛은 없다. p.86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p.90
'가급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을 꾸며주는 척하지만 슬그머니 '해도 된다'의 편도 들어주니 말이다. p.93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p.104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씨발도 쓰지 않는다. 다들 이십대 때보다 지금이 훨신 편안해져서도 그렇고, 그 의심스러운 어원을 알고 나서 정이 뚝 떨어져서도 그랬지만, Y는 나이를 먹으니 씨발은 어쩐지 민망하다고 했다. 대신에 가끔씩 '썅'을 쓴다. 대체 이건 어떤 점에서 덜 민망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p.122
와인이 무서울 때가 또 언제인지 아는가? 마시고 토할 때다. 무한 각혈하는 기분이 들어 너무 무섭다... p.138
무엇보다 만취 상태로 곧바로 건너뛰기에는, 술동무와 함께 서서히 취기에 젖어드는 과정이 주는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때로는 이게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의 전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을 백지에 쓱쓱쓱쓱 계속 문지르다 보면 연필심이 점점 동글동글하고 뭉툭해지는 것처럼, 어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그 밖의 대외적 자아로서 바짝 벼려져 있던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두 잔 세 잔 마시면서 조금씩 동글동글하고 뭉툭해져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술이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래서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이 좋다. p.165~166
-
아무튼, 술! 이라니, 이것은 내가 안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게다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의 김혼비 작가가 썼다니 재미도 보장됐을 터.
출간하자마자 사긴 했는데 이런 유의 책은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없기 때문에(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ㅠㅠ) 미뤄 두다가 '책읽아웃' 방송에 나오신단 소식까지 듣고 더는 미룰 수 없어 부랴부랴 읽었다.
'아무튼 팟캐스트' 방송을 재미있게 듣긴 했으나, 스포 덕분에 백일주에 관한 에피소드는 읽는 재미가 반감됐기 때문.
아무튼 술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이 책 안 읽은 사람 없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