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엄기호 | 나무연필 | 2018


가치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는 그것이 어떤 좋은 열매, 즉 교훈을 남길 때다. 또한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이 있고, 그 끝이 더 좋은 열매를 남길 때 우리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고통 역시 가치가 있다면 교훈을 남기며 끝이 나야 한다. 교훈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성장을 꾀할 수 있을 때 고통도 가치가 있다. p.44


인간이 겪는 참혹한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았던 많은 학자들이 말해왔듯이, 절대적 고통 앞에서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은 사실 고통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그 고통을 겪는 수밖에 없다. 그런 교통을 겪다보면 사람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고통의 무의미성이야말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고통이다. p.48


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은, 법의 언어로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들리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정심밖에 없다. "안됐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에 호소했을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절벽에 부딪히면 사람은 더욱더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고통 그 자체도 무의미한데 고통을 해결하려는 자신의 호소조차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람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극단의 고통을 겪게 된다. p.101


곁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곁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친구로서 상대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 결이다. 그렇기에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곁이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 헤아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조차 그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곁'이라는 친밀성의 세계가 갖는 특징이다. p.104


무엇보다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는 '신중한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를 신중하게 쓰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게 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언어가 필요하다. 또한 이 언어는 경망스럽게 모든 것을 마음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분별해낼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고통의 사회적 차원과 관계의 측면, 그리고 내적 측면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잘 알고 고통을 겪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점에서 그 언어는 부단히 신중한 것이어야만 한다. p.132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라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포르노처럼 자기를 드러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끌 수 없었다. p.149


"저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 말은 존중이 모욕으로 도착倒錯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우리 모두 안다. 당신이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지를.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을 '그'로 생각하지 못하고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무엇도 누구도 아닌 '그'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한 것이다. 인격에 대한 모욕 말이다. p.157


지금은 서로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좀처럼 어려운 시대다. 오히려 확신을 품고 서로에게 이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 구질구질한 것이 되었다. "뭘 믿고 그렇게 했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믿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이며 확신하는 자가 가장 바보 같은 자가 된 세상이다. 그렇지에 믿지 않아야 상처를 덜 받는다. 신뢰는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되었다. p.160


관종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흐름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단편 단편에서 사람들의 위선과 추악함이 드러나는 감추어진 '팩트'다. 팩트는 '사실'보다는 '단편'이라는 뜻에 훨씬 가깝다. p.192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피해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사람이고 그 일상의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은 고통을 당한 사람'답게'라는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순식간에 그에 대한 조롱과 공격으로 전환된다. p.201~202


결국 피해자들은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하나는 피해자답게 모든 것이 무너져 있는 존재를 연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고통도 없었떤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양자택일의 강요를 따르면, 피해자가 언어를 만들어 자신의 삶을 폐허 위에 복구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삶이 복구되는 순간 그는 가짜로 매도당한다. p.204


우치다 타츠루는 <민들레> 115호에 수록된 '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교양의 가장 큰 역할을 쪼개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도 배운 사람, 즉 언어가 있는 사람에겐 쪼갤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그는 이를 해상도에 비유한다. 즉 교양이 있다는 말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한 해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높은 해상도에서 그의 말을 듣고 보면 그의 말에서 차이 같지 않은 차이를 감지하고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다. p.213


"확실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길을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건 달라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반발이 생기거나 억울함이 들 때도 ㅁ낳은데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이상하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여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p.252


길을 걸으며 이야기 나눌 때는 상대 이야기를 듣는 것과 자기에 집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잘 된다. 상대 이야기를 들으며 굳이 내 판단을 바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참을 길게 들을 수 있다. 앉아서 이야기할 때처럼 바로 반박하듯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부담스러운 말은 흘려들으며 다른 것을 봐도 무방하다. 같이 걷기 위해 같이 있는 것이지, 말하기 위해 같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상대도 알기 때문이다. 걷기가 생각과 생각, 말하기와 말하기 사이를 띄워주고 완충해준다. p.25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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