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정반대의 행복

거의 정반대의 행복 | 난다 | 위즈덤하우스 | 2018


임신의 모든 트러블은 몸 하나를 두 사람이 나눠 쓴다는 데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당황스럽다. 아직 엄지손가락만큼도 자라지 않은 아기가 내 몸을 모조리 사용하려 든다는 사실이. 나는 내 방 한쪽 구석만 빌려줄 생각이었는데 뻔뻔하게도 여기저기 짐을 풀어놓고는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p.31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샬롯의 남편 트레이는 미래의 아기를 위해 주문한 팔찌에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다.

"We had each other, and then we had you, and then we had everything. Love, mommy and daddy.(우리에겐 서로가 있고, 또 네가 있단다. 그러면 우리는 전부를 가진 거야.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나에겐 남편이 있고 남편에겐 내가 있고 우리에겐 네가 있다. 이것으로 완벽하다. 한 번쯤 가져보아도 좋을 행복의 우월감. p.41


사실 나는 태교라는 말에 약간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임신한 뒤부터 나라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앞에 '태교'가 붙는 것이 의아했다. 늘 하던 독서를 해도 "그래, 독서가 태교에 좋지"가 되었고 뜨개질이나 음악 감상도 "그래, 태교에 좋겠다"가 되곤 했다. 별생각없이 건네는 말이라고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나를 건너뛴 채 배 속 태아와 주고받는 안부 인사처럼 어색하게 여겨졌다. 저기요, 저도 여기 있거든요. p.51


내 생각에 진정한 태교란 남들이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임신부 열 받게 하지 않기'가 그것이다.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임신부에게 충고하지 않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라는 사람이 임신을 한 것인데 갈수록 임신이 내가 가진 유일한 정체성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SNS에 올리는 음식 사진이나 영화는 나의 임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그 성분과 폭력성을 확인받았고, 배가 불러서 누가 봐도 임신부로 보이게 되자 대도시에서 익명으로 자유롭게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자주 좌절되었다.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지나가는 인간이 아닌 '임신한 몸'이 된 듯했다. p.52


이제와 생각해보면 '못 하겠다'는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려웠을까 싶지만 세상에서 제일 거스르기 어려운 것이 분위기라는 것이다. 다 같이 웃어야 하는 분위기, 다 같이 뭔가를 해야 하는 그 분위기. 아기에게는 모유가 최고의 선물이며 그걸 주지 못하는 엄마는 모성이 부족하다고 비난받는 세상의 분위기.

초보 엄마였던 나는 그 분위기를 깨도 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p.96~97


19일간의 모유 수유 도전으로 얻은 건, 육아 생활의 가이드라인 역시 지금까지의 내 인생 가이드라인과 다를 것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최선을 다하되 나를 갈아 넣지는 말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길 것. p.99


아침에 눈뜨면 내 삶을 일으키는 동시에 스스로는 먹을 수도 잘 수도 없는 인간 한 명 분량의 삶을 함께 조율해야 하는 정신없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동차 두 대를 동시에 운전하는 기분이 이럴까. 산후조리 기간이 끝나고 오늘부터 혼자서 육아를 해보겠다고 도전했던 첫날, 퇴근 후 아기를 안고 침대에 앉아 있는 내 표정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본 남편은 당장 베이비시터부터 구하자고 했다. 남편과 시터가 없었따면 아마 내 차는 지그재그로 달리다 어디론가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p.108


엄마가 시터에게 아기를 맡기고 이렇게 홀가분한 채 있어도 될까 싶은 초보 엄마의 죄책감, 이 시간에 그냥 모자란 잠을 보충할까 아니면 어질러진 집을 정리할까 하는 기회비용 고민, 거기에 만사가 다 귀찮은 마음까지 떨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영화와 그림을 보고, 만화책을 사고, 먹고 싶은 빵을 사러 갔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데 예전의 관심사를 유지해보려는 거,너무 부자연스럽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생활에 아름다운 부분을 조금이라도 남겨두려 애썼던 시간들이 내가 가진 인간성을 유지하게 해준 듯하다. 그 시간들 덕분에 육아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었다고 믿는다. p.110~111


나는 남편이 없는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남편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남편이 사라진 이후의 슬픔을 나는 원하는 만큼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시호에 대해서는 언제나 도입부도 시작하지 ㅁ소하고 화들짝 놀라 되돌아간다. 상상이 씨가 될까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리지만 가끔 멋대로 튀는 끔찍한 생각에 울기도 한다. 자식이 생긴다는 건 끝없는 걱정과 두려움의 저주 속에 갇히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p.128


세상이 아이에게 조금 더 호의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길을 잃고 물에 빠지는 일도, 유치원 버스에 혼자 남겨지는 일도, 아이 웃음소리에 '쉿' 하고 매섭게 노려보는 얼굴도 없었으면. 아기가 태어난 후 세상을 수선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p.129


내 불만은 이걸 나만 겪는다는 데 있다. 임신을 할 수 있는 쪽이 여자니까 여자인 내가 임신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째서 자연은 여자에게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 거지? 어째서 남편은 재료(의 일부)만 제공하고도 완제품을 가지게 되느냔 말이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걸까. 하지만 세상에는 지구가 둥근 것이 화가 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p.273


정말로 솔직히 말한다면, 인간이 임신, 출산, 육아의 괴로움을 미리 겪어볼 수 있었다면 인류는 지속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평하게도 자식을 낳고 기르는 행복 역시 미리 겪어볼 수 없다. 결국 불확실하기에 사람은 백지에 점을 찍는 것이고, 확신이란 저지른 뒤에 드는 것 아닐까. p.313


얼마 전 읽은 책에 인용된 프로이트의 글이 인상 깊었다. 요점만 옮기자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진실의 눈이 날카로운 사람은 종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신, 출산, 육아의 괴로움을 직접 겪지 않고도 진실을 간파하는 난 사람이 있긴 한가 보다. 그래서 적당히 낙관적인 쪽이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종의 보존에 더 기여한다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낙관적인 쪽은 아이를 낳고 진실을 보는 자(!)는 그렇지 않는다라... p.314


물론 아이가 태어난 뒤 전보다 더 책임감을 느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가 내 책상에 매달릴 때 사탕과 장난감 같은 임기응변으로 달랠지언정 너를 먹여 살리려고 일한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않는다. 아이를 기만하는 말이고 내 일에게도 미안해지니까. 앞으로 시호는 자라며 삶 속에 일이 있다는 것을 배워나갈 것이다. 시호에게 일이란 멋진 것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부분적으로는 일하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즐거워서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다. p.317~318


-

아이를 최소 셋은 낳고 싶다던 내 친구는 강산이 한 번쯤 변할 만한 시간을 보낸 후, 딩크로 살거나 최대 한 명만 낳겠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를 변하게 한 건 아마 임신과 출산, 육아를 먼저 거친 주변인들의 상태와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이진 않는 미래 때문이리라.


'책읽아웃'에서 난다 작가님이 나온 방송을 재미있게 듣고도, 출산과 육아는 아직 내 관심사가 아닌지라 미뤄 뒀다가 뒤늦게 읽었다. 생명을 품고 키워내는 일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고, 그 과정에서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과 거의 정반대의 어떤 행복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실을 보는 자(!)라 그런지 여전히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은 열심히 돕고 싶다.

토트*

덕업일치를 꿈꾸며 살아요

    이미지 맵

    冊 - 밑줄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