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기시 마사히코 | 김경원 옮김 | 이마 | 2016
나는 지금 이 책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다른 언어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이 잘 전달되리라는 기대라기보다는 나조차 생각해 보지도 못한 방식으로 읽히리라는 기대를 말합니다. 번역이란 그저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새롭게 덧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7
난 인터넷을 뒤적거리면서 일반인들이 쓴 방대한 양의 블로그나 트위터를 쳐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물가로 떠내려온 말라비틀어진 나뭇조각처럼 5년이나 업데이트하지 않은 블로그에서는 어떤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p.12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p.98
완전히 개인적으로 나만의 '좋은 것'이라면 누구를 상처 입힐 일도 없다. 거기에는 원래부터 나 이외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를 배제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은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들과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구별을 자동적으로 짓는다. p.110
육체노동을 하면서 이 일은 몸이라기보다는 감각, 또는 시간을 파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현장에 들어가 단순한 중노동을 견디고 있노라면, 그러는 사이에 5시가 되고 하루의 일이 끝난다. 그동안 8시간이라면 8시간 동안, 줄곧 나라는 의식은 덥다는 감각, 무겁다는 감각, 피곤하다는 감각을 계속 느끼게 된다. p.136
한쪽에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일본인이라는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애초에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평범함'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바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p.166
물론 우리 남자는 더 나아가 '어느 쪽에 속하는 성(性)인가?'를 생각하는 과제조차 면제받고 있다. 남자는 마음껏 '개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지만, 우리 곁에서 여성들은 '여자로 있다.' p.167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가슴 쓰라린 일이다. 애초부터 그것 자체가 늘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번 붙여진 딱지를 간단하게 벗겨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p.168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p.170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p.191
'좋은 사회'를 측정하는 기준은 수없이 많겠지만, 그중 하나는 '문화 생산이 활발한 사회'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음악, 문화, 영화, 만화 등 여러 장르에서 무시무시한 작품을 산출하는 '천재'가 많은 사회는 그것이 적은 사회보다 좋은 사회임에 틀림없다. p.192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형태를 취하는 착취가 있다. 그리고 본인을 걱정한다는 식으로 억지로 책임을 떠맡기는 듯한 개입이 있다. p.201
우리는 억지로 강요받은 근소한 선택지 가운데 몇 가지를 선택할 뿐인데,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으니까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래서는 무척이나 살기 힘든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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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은 무척 흥미로웠으나 갈수록 했던 얘기만 반복하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좋았다. '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축제와 망설임'은 특히 좋았고, 맺음말도 소중히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