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도살 - 신형철

[문화와 삶] 번역과 도살

내가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아직 읽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 작품이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고전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한동안 <레미제라블>이라는 화제를 피해 다녔다. 독서가들이라면 대체로 동감할 것이다. 당장 읽을 여유가 없더라도 일단 사두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책이다. 절판되어버리면 정작 필요할 땐 구할 수 없게 되거니와, 가까운 곳에 놔두면 조금씩이라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 <레미제라블> 한 질을 구입했다. 물론 아직 읽지 못했다.

외국소설의 경우 번역자의 실력과 출판사의 에디터십은 책의 가치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다. 번역은 회를 뜨는 일과 비슷해서, 어차피 살아 있는 생선에 칼을 댈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싱싱한 상태로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독서가들은 정작 회는 아무 데서나 먹어도 번역서는 아무렇게나 택하지 않는다. 나는 당연하게도 서점에 가서 <레미제라블>의 번역본 중 최소한의 믿음을 주는 2종을 놓고 한 챕터를 대조했다. 먼저 검토한 A의 경우 한쪽에 한두 문장씩은 어김없이 알쏭달쏭했는데, B에서 같은 대목은 싱겁도록 평이하게 이해됐다. 당연히 B를 구입했다.

쉽게 읽히는 것이 꼭 좋은 번역인 것은 아니다. 애초 난해한 문장이라면 그 난해함의 구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성실한 번역이다. 특히 문학작품의 경우 난해한 대목은 저자와 독자가 가장 신중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는 공간인데, 그 공간 자체를 제거한다면 이는 번역자의 월권이다. 그런데 한국어 감각이 둔탁한 번역자가 애초 쉬운 문장을 본의 아니게 심오한 문장으로 만드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보기에 A가 그런 경우였다. 이런 대조 작업에 이골이 난 독서가들은, 반드시 원서와 대조하지 않아도, 번역서들만으로도 이 정도는 구별해낼 수 있다.

이런 대조 작업이 번거롭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로 대조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종의 번역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불과 15년 저너만 해도 상황은 열악했다. 저명한 고전인데도 시중에서 번역본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나마 있어도 불량식품이어서 억지로 먹는 고역을 치러야 할 때도 많았다. 최근 세계문학전집 출간 붐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 있는 비판들이 나오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덕분에 표절이나 짜깁기 번역 등이 발붙일 수 없게 됐고, 번역의 품질과 개성으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닫.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모 출판사가 내고 있는 세계문학 고전 얘기다. 정체불명의 집단 번역 시스템을 채택하여 만들어낸 책인데도 터무니없이 싼 가격 때문에 엄청난 양이 팔리고 있다고 들었다. 무기명 집단 번역일지라도 결과만 좋다면 문제 삼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서 어떤 책의 경우는 원서에 있는 문장을 빠뜨리거나 여러 문장을 하나로 축약한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무참하게 훼손된 책을 팔아서 이득을 얻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출판사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 내게는 아연하게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분신 하나를 창조하는 일이다. 이 글이 지면에 실리면서 내 뜻과 무관하게 잘리고 합쳐진다면 나는 당장 칼럼 쓰기를 중단할 것이다. 나 자신이 잘리고 합쳐지는 일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대단하지도 않은 글을 쓰는 나에게도 이런데, 위대한 고전을 쓴 저자들이야 오죽할 것인가. 앞에서 번역을 회 뜨기에 비유했는데, 지금 내 눈에는, 도마에 올라가 있는 대문호가 거친 칼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도살이다. 이런 일이 횡행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지나온 시절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말자.


신형철 ㅣ 문학평론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13210556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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