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그해, 여름 손님 | 안드레 애치먼 지음 | 정지현 옮김 | 잔 | 2018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내가 무엇을 원했을까? 가차 없이 속마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왜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을까?

어쩌면 그에게서 최소한으로 바란 건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또래보다 덜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으리라. 내가 그의 발아래에 너무도 쉽게 떨어뜨려 버린 존엄성을 그가 고개 숙여 주워 준다면 더 바랄게 없을 터였다. p.44~45


내가 푹 빠지면 상대방도 푹 빠진다는 법칙이 어딘가에 있다. Amor ch'a null'amato amar perdona(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p.45


'나중에 다시 시도해 봐'는 내가 매일 밤 올리버와 가까워지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스스로 되뇌는 말이었다. 나중에 다시 시도한다는 것은 당장은 용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다시 시도해 볼 용기와 의지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벌써부터 뭔가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있지도 않은 돈으로, 투자하지도 않은 돈으로 수익을 거두는 것처럼. p.72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겨 낼 거예요." 소설에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떠나간 연인을 잊어버리고 체면도 살려 주는 말이었다. 속마음이 완전히 드러난 사람에게 존엄성과 용기를 되찾아 주는 말이었다. p.110


또다시 고개를 젓는다. 난 나를 알아.

그가 저렇게 말하는 걸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죽도록 원하지만 시작하면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아예 시작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신을 아니까 만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침착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p.123


나는 서점에서 그에게 책을 선물하고 나중에 아이스크림을 사겠다고 우겼는데,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 B의 좁고 그늘진 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걸을 수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p.141


"네가 그만둔다면 난 죽도록 괴로울 거야."

그날 아침 일기에 그 말을 적었다. 꿈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은 빠뜨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일기를 읽었을 때 아주 잠깐이라도 그가 정말로 나에게 애원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믿고 싶어서였다. p.141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어. 자신을 숨기거든.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 p.148~149


나는 그를 원했지만 그 없이도 살 수 있었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괜찮았다. p.184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잔혹하게 대하지 마라. 밤에 잠 못 이루게 하는 자기 안으로의 침잠은 끔찍하지. 타인이 너무 일찍 나를 잊는 것 또한 마찬가지야.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 p.278~279


"이미 눈치 챈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이 많은 걸 얘기해 주지." p.288



-

그해, 여름 손님. 한여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까. 그래도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 다행이다.

올리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아이스크림을 사겠다고 우기는 엘리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네.

토트*

덕업일치를 꿈꾸며 살아요

    이미지 맵

    冊 - 밑줄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