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외국어

아무튼 외국어 | 조지영 | 위고 | 2018


프랑스어처럼 시제가 괴물 같지 않고, 독일어의 무시무시한 관사 같은 것도 없지만, 중국어는 보어가 복잡하다.

병음이 적혀 있지 않은, 띄어쓰기 없는 기나긴 한자의 행렬을 보고 있지면, 그 자체로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의 위용이 느껴진다.

외국어의 평화를 잠식하는 것은 대체로 동사라는 막강한 빌런의 공이 크다. 마치 공부를 잘해도 수학을 못하면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동사를 잘 구사한다는 뜻과 많이 다르지 않다. p.14


무엇보다도 독일어를 공부할 때는 이 언어가 나에게 실질적인 효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서인지, 교양이 올라가는(?) 느낌마저 든다. 대단한 대가가 되는 일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 열심히 해도 잘하기는 쉽지 않은 일, 무엇보다도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쓸데없는 일'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p.72


작가 김훈이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를 놓고 고민한다고 할 때, 적어도 한국어 네이티브들은 고민의 깊이까지는 짐작하기 어려워도, 두 문장의 차이 정도는 쉽게 추측한다. 그런데 저 문장을 외국어로 번역하면 어떤 모양새가 될까? 어떻게 '이'와 '은'의 차이를 번역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p.110


중국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는 명쾌한 것 같았다. 중국에 오는 사람이라면 응당 중국어를 알아야 된다고 믿는 태도 혹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패스(!)한다는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p.129


그래도 성조의 애한과 굴욕을 대략 체념하고 나면 의외의 부분에서 중국어가 친한 척을 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단수와 복수도 없고, 당연히 성, 수 일치 같은 것도 없고, 관사도 없고, 동사가 격에 따라 변화하지도 않고, 심지어 시제마저 거의 없다는 점이 그렇다. p.146


어쨌든 동사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학 초심자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혁명적인 은총이다. 물론 이것이 과연 성조와 맞바꿀 만한 허들인지는 개인차가 있겠으나, 어쨌든 대부분의 언어를 포기하게 하는 협곡 하나가 제거된 셈이긴 하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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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무튼 OOO'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외국어>라니. 안 읽을 수가 없쟈나.


02. 일본 여행 갔을 때 "그래도 이곳 간판은 (유럽과 달리) 군데군데 한자가 보여서 마음이 편안해져."라는 동기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는데, 그 한자의 행렬이 누군가에겐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의 위용처럼 느껴질 수도 있구나.


03. 이 책엔 다양한 외국어가 등장하지만 역시나 중국어 부분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고 보니 중국어엔 단수와 복수도 없고, 성이나 수 일치도 없고 관사도 없고... 성조가 있는 대신 없는 것도 많네. 그래서 내가 많이 좋아한다. 난 보어는 딱히 까다롭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了가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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